01) 망분리 듀얼 PC, 데스크톱 컴퓨터, 콘트롤리 이숙영 (1)
(컴패니언 주부에서 컴퓨터 제조업체 대표로 / 콘트리 이숙영)
“엄마, 이 영화를 보세요.며칠 전에 친구와 보았지만 어머니에게 특별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와 꼭 같이 보세요””그래?무슨 영화?”IMF를 배경으로 한 영화입니다.
”그 순간 가슴이 저렸다.
당시 초등 학교 2학년이던 딸이 하루 아침에 어머니를 직장에 빼앗긴 그 때를 기억하고 있다는 것만은 아니었다.
인생의 큰 전환점이 된 그때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며칠 뒤 새벽에 시간을 만들어 영화관에 들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코 등이 시큰거렸다.
1998년 IMF광풍이 대한민국을 흔들었다.
기업은 차례차례로 쓰러지고 실업자가 속출하고 가정이 붕괴하고 노숙인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저와 저의 가정도 그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때를 기점으로 내 인생은 전혀 예상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동안 전업 주부로 살며, 아침에 사업가로 변신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변신은 오늘의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고 상생의 길을 걷는 사회적 기업의 컨트리를 돈독히 하는 출발점이 됐다.
(태국 반려동물 차량분에 구축한 컴트리 무료 컴퓨터교실 1호점 교육현장)
1998년 그때는 아침에 눈을 뜨면 H그룹의 뉴스가 쏟아졌다.
당시 그 회사의 전산 운영 총괄 이사이던 남편은 몇달간 월급이 밀리는 등 우여곡절 끝에 결국 직장을 잃었다.
알린 두 딸의 미소는 여전히 밝지만, 수중에 남은 돈은 200만원이 전부였다.
실업자가 잇따르는 가운데, 다른 일을 찾기는 결코 쉽지 않았다.
뭔가 해야 했다.
1999년 2월 시스텟크을 창업하고 남편과 함께 컴퓨터 유통 사업을 시작했다.
H그룹에 컴퓨터를 납품하던 지인이 컴퓨터 관련 사업을 진행한 것이 계기가 됐다.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이 있어서 우선 믿어 보자는 마음이 컸다.
서울 국제 전자 센터의 일각에 작은 공간을 얻어 조립 PC판매를 시작했다.
집기를 살 돈조차 없다, 재활용품의 회수 상자에서 책상과 의자를 데리고 와서 매장을 마련, 월급을 많이 내지 못하고 직원의 도시락까지 만들어 주면서 가급적 벨트를 맸다.
당시 저는 컴퓨터에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
대학 시절, 전산학 개론 수업에서 들은 CPU, 메모리 정도의 단어만이 어슴푸레 기억에 남아 있었을 뿐 정확히 아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이쪽 일을 하려면 알아 둬야 했기 때문에 자존심을 버리고 주변 점포의 젊은이들에게 듣고 컴퓨터 부품을 익히고 조립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루에 2~3시간씩 숙박하면서 꾸준히 일하다 매장은 빨리 정착했다.
(국가부도의 날에서 창업결신의 날로/컴트리 이숙영)
그 해 가을에는 또 다른 기회도 얻었다.
당시는 정보 통신부가 인터넷 PC보급 사업에 열을 올리던 때이고, 컴퓨터 보급되고 있었다.
시장은 갈수록 커지면서 한 업체에서 우체국을 통해서 주문을 받은 컴퓨터를 가정에 설치하는 업무를 맡게 됐다.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낮에는 매장에서 컴퓨터를 판매하고 오후 8시경에 폐점하자, 승합차에 제품을 가득 싣고 남편과 함께 집집마다 컴퓨터를 설치하러 갔다.
그 시대, 컴퓨터는 얼마나 무거운?, 저녁마다 건물의 4층, 5층을 철 통 같은 컴퓨터와 CRT모니터를 가지고 3,4번씩 오르내리자 마치 손이 떨고 있는 사람처럼 손이 떨렸다.
육체적 고통보다 힘들었던 것은 초등 학교 2학년 5학년인 두 딸이 자기들끼리 저녁을 만들어 먹으며 쓸쓸할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밤 12시가 순식간이었다.
그래도 새벽까지 컴퓨터 앞에 앉아 관련 자료를 찾으면서 기술과 정보를 축적했다.
애프터 서비스 요청의 전화가 오면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뛰어갔다.
(망분리 PC를 설명하고 있는 컴트리 이숙영 대표)그렇게 매달렸기 때문인지 사업은 조금씩 숨이 끊어졌다.
어느 순간부터는 컴퓨터 시장이 급속히 성장하면서 한국 사업 역시 고공 행진을 시작했다.
저는 대형 서버 시스템 구축과 시스템 에어컨 설치 사업까지 수주 규모를 더 확대했다.
직원 7명에 매출이 50억원을 웃도는 정도였다.
그런 2006년 나는 잘 나가던 사업을 그만뒀다.
남편은 이미 2002년 박사 학위를 받아 대학에 가면 준비한 끝에 꿈을 이루고 대학에 가고, 나 혼자서 사업을 운영하던 시절이었다.
스스로 가장이라고 생각하고 그동안 앞만 보고 쉴 새 없이 달려오느라 피로도 하고 어느 정도 상황이 좋아지면서 어릴 적 꿈이었던 작가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인생은 언제나 예측 불가능이다.
그래서 더 의미를 지니는지도 모른다.
결국 그 해 2개월 만에 나는 다시 창업의 길에 들어섰다.
믿지 못하는 것에 기도하던 곳, 사업가의 길을 사명으로 받게 된 것이다.
주부로 지냈던 인생 제1막에서 컴퓨터 회사 대표로 변신한 인생 제2막을 지나 다시 새로운 인생 제3막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제조기업으로 변신/컴트리 이숙영)06년 가나 SNC를 창업하고 컴퓨터 유통을 재개했다.
그런데 3여년이 지나면 인터넷이 점점 발달하는 유통 시장이 무너진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옮아가경향이 눈에 들어 있는 컴퓨터 시장이 가장 먼저 붕괴할 것이라는 위기감이 갈수록 확신으로 굳어졌다.
매출도 늘지 않고 정체되면 저는 다시 한번 결단을 내렸다.
”이왕이면 나의 브랜드로 컴퓨터를 직접 만들어 보자!
”그 길에서 회사명을 컴 트리로 변경하고 메이커의 길에 들어섰다.
중소 벤처 기업 진흥 공단에서 창업 기업 지원 자금을 받아 서울 금천구에 공장에서 사들였다.
되돌아보면 당시 컴퓨터 제조가 얼마나 어려운 험한 길인지를 안다면 결코 발을 들여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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